목차
은유와 상징, 인물과 관계,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안은영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묵묵히 우리 곁에서 싸우고 있는지 되새기며,
보이지 않는 고통과 조용한 연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상한 세계의 평범한 사람
세상은 언제나 설명되지 않는 일들로 가득하다.
때로는 이유 없는 불안이, 설명되지 않는 피로가, 혹은 존재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괴물 같은 무언가가 우리 삶을 휘감는다.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은 바로 그런, “말이 되지 않는 것”들과 묵묵히 싸우는 사람의 이야기다.
안은영은 보건교사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평범한 교직원이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젤리’를 본다.
이 젤리는 악의나 불순한 에너지, 욕망이 뭉쳐 생긴 것들이다.
어떤 건 흐물거리고, 어떤 건 끈적하고, 때로는 유해하고, 가끔은 그저 웃기기도 하다.
세상은 이 젤리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그걸 못 보니까 다행일까?
안은영은 말없이 그 젤리들과 싸운다. 플라스틱 칼과 비비탄 총으로.
그건 웃기면서도 조금 슬프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고된 노동을 그녀는 자신의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이 소설은 특별한 사건보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태도’에 집중한다.
안은영은 세상을 구원하려 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더 선하지도 않고, 영웅적인 대단함도 없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이야기 속 학교는 작은 세계다.
청춘의 불안, 질투, 소외, 꿈, 폭력, 침묵…
아이들은 복잡한 감정을 끌어안고 자란다.
그 감정들이 어딘가에 쌓이고 쌓여, 젤리로 변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이 젤리들은 은유다.
그리고 그 은유는 너무도 솔직해서, 때론 눈물이 날 만큼 날카롭다.
작가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이 세계의 이상함을 목격하고 있다.’
다만 어떤 사람은 그걸 보지 못한 척 하고, 어떤 사람은 아예 감지하지 못하고,
또 누군가는 그걸 스스로 감당한다.
안은영은 마지막 부류다.
세상의 ‘찌꺼기’를 감지하고, 그걸 어깨 위에 짊어지고 조용히 싸운다.
이건 단지 귀신을 때려잡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다른 사람들이 짊어지지 않으려는 것까지, 조용히 떠안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녀의 무기는 너무도 조악하다.
장난감 총, 유치한 칼, 그 흔한 퇴마 의식 하나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들을 들고 이 세계에 맞선다.
그리고 그 모습은, 지독히 슬프고, 지독히 사랑스럽다.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이 ‘특이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현실적인 감정을 건드린다는 점이다.
누구에게도 말 못할 비밀을 안고, 누구보다 무거운 책임을 지며,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싸움을 혼자 감당하고 있는 사람.
당신도 어쩌면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이 소설은 그들에게 말한다.
“당신은 틀리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것들과 싸우고 있는 사람은, 사실 누구보다 용감한 사람이다.”
이 글을 읽으며, 나는 내 삶의 ‘젤리’들을 떠올렸다.
설명되지 않는 불안, 의심받을까 두려워 꺼내지 못한 말,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반드시 했어야 했던 일.
그 모든 것들이 은영이 매일 마주하는 젤리처럼 느껴졌다.
소설은 말없이 그걸 꺼내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도 어쩌면, 안은영일지 몰라요.”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는 사람들
이야기 속 학교는 단지 교육의 공간이 아니다. 그 안은 사회의 축소판이며, 감정의 화석들이 켜켜이 쌓여있는 공간이다. 학생들은 말하지 못한 채로 불안을 껴안고 있고, 교사들은 습관적으로 아이들을 관리하고 있으며, 공간 전체가 응어리진 감정으로 진동하고 있다.
은영은 그런 파동을 감지한다. 그녀는 ‘보인다’는 말보다는 ‘느낀다’에 더 가깝다. 젤리는 시각적이지만, 사실 그것은 감정의 비유다. 이 소설에서의 ‘젤리’는 누군가의 외로움이고, 분노이고, 상처다. 그리고 그것은 늘 말 없는 사람들 주변에 웅크리고 있다.
은영이 싸우는 건 귀신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말하지 못한 채로 남아있는 감정의 잔해”와 싸운다. 그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치며, 때로는 사고가 되고, 때로는 병이 되고, 때로는 파괴가 된다.
작가 정세랑은 젤리를 판타지적 설정으로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담긴 정서와 사회의 민낯을 슬며시 펼쳐놓는다. 우리는 무심히 지나쳤던 작은 감정들, 누군가의 일그러진 표정, 말 끝의 침묵 안에 있었던 젤리들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감지해주는 사람의 존재가, 세상엔 얼마나 귀한지 깨닫게 된다. ‘이상한 걸 본다는 것’은 단지 초능력이 아니다. 그건 어떤 세계에도 무관심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그리고 은영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안은영이 지닌 힘은 이 소설이 세상과 맞서는 방식이기도 하다.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아무도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듣고, 그래서 결국 혼자 남는 사람. 그 고독은 애틋하고, 안쓰럽고, 그렇기 때문에 더 강하다.
그녀는 해결하지 못해도, 무시하지 않는다. 막을 수 없다 해도, 외면하지 않는다. 그 태도야말로, 이 소설이 전하고 싶은 진짜 메시지가 아닐까.
우리는 왜 싸우는가
이 소설은 ‘착한 사람의 정의 실현’ 같은 단순한 구조로 흘러가지 않는다. 은영은 자주 지친다. 혼자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 벅차다. 사람들이 모르는 일을 하고, 그 일은 아무에게도 설명되지 않는다. 게다가 젤리와 싸운다는 건 끝이 없다. 하루 정리해도 다음날 또 생긴다. 누군가 상처받고, 미움 받고, 외면당하면 또 젤리는 생긴다.
이런 세계에서 은영이 계속 싸우는 이유는 단 하나,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그녀는 절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희망으로만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녀는 그냥, 오늘도 젤리를 정리한다. 누구도 못 보고,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일을 하면서. 그건 마치 세상의 바닥을 묵묵히 쓸고 다니는 사람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슬프다. 그리고 아름답다. 은영은 상처받고도 계속 웃는다. 혼잣말처럼 욕하고, 어쩔 땐 투덜대고, 가끔은 소리친다. 하지만 결국 다시 돌아온다. 그녀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안다.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그럼에도 누군가는 지금 이 자리에서라도 지켜야 한다는 걸.
이것이 은영이 ‘보건교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강렬해진다. 치료와 보호, 정화와 대화, 살피는 것과 묵묵함. 그 모든 것이 ‘보건교사’라는 직업과 절묘하게 겹친다.
은영은 단지 싸우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사람을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 사람이다.
때로는 "나는 뭔가 대단한 일을 해야만 가치 있는 사람이야"라고 착각하지만, 은영은 말한다. “그게 아니라, 작고 보잘것없는 일을 꾸준히 해내는 것도 하나의 전쟁이다.”
이 소설은 ‘거대한 변화’보다, ‘포기하지 않는 일상’을 끈질기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끈질김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힘인지도 모른다.
연대, 함께 싸우는 존재들
이 소설엔 조용하지만 단단한 ‘연대’가 있다. 한문 교사 홍인표라는 인물은 그 대표적 존재다. 겉으로는 약간 둔해 보이고, 혼자 책만 읽는 인물이지만 그는 은영이 보는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세상이 말하지 않는 일을 믿는다는 건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는, 그 용기를 낸다. 무언가를 직접 보지 못해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힘인가.
은영은 처음엔 그런 인표에게 벽을 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와의 연결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깨닫는다.
이 소설은 말한다. “세상을 바꾸는 건 거창한 계획이 아니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의 싸움을 가만히 지켜봐 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서로에게 무기가 된다.”
이 연대는 로맨스도 아니고, 우정도 아니고, 그보다 더 단단한 인간 간의 신뢰다. 그리고 그건 이 소설을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 세상엔 분명 안은영이 있고, 또 그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홍인표도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할 때, 세상은 조금 더 괜찮아질 수 있다.
우리는 종종 '혼자 싸우는 게 멋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혼자도 괜찮지만, 함께라면 더 오래 버틸 수 있다고. 누군가 옆에 있어준다는 건 그 자체로 기적이라고.
끝내 싸우고, 조용히 살아간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조용한 책이다. 처음에는 유쾌한 설정과 독특한 세계관에 놀라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가슴에 이상한 울림이 남는다.
그 울림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너, 지금 네 주변의 젤리를 보고 있니?” “너도 은영이처럼 조용히 무언가와 싸우고 있지 않니?” “괜찮아. 너 혼자 아니야.”
정세랑은 우리가 외면한 존재들,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따뜻하고 정직한 시선으로 말을 건넨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조용히 살아가면서, 보이지 않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우리가 얼마나 쉽게 잊는지, 이 책은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상기시킨다.
누군가의 고통을 감지하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기꺼이 그 짐을 지는 사람. 그가 ‘보건교사’라서가 아니라, ‘은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응원하게 된다.
이 책은 말한다. “세상은 이상하고, 젤리는 계속 생긴다. 하지만 괜찮아. 우린 아직 싸울 수 있어.”
당신이 지금 어떤 젤리와 싸우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당신이 여전히 싸우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싸움이 절대 혼자가 아니라는 것.
“보이지 않는 것과 싸우는 모든 이들에게 – 이 세계는 당신 덕분에 괜찮은 척이라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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