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1부 – 부모 면접이라는 기이한 풍경
- 2부 – 관계가 아닌 계약으로 시작된 가족
- 3부 – 선택받지 못한 존재들의 마음
- 4부 – 질문을 되돌려주는 용기
- 5부 – 우리는 연결될 수 있을까
『페인트』는 '국가에서 아이를 위탁 관리하는 시대'라는 기발한 설정에서 출발하지만, 결국은 부모, 가족, 성장이라는 보편적인 질문으로 돌아온다. 본 리뷰는 스포일러 없이 이희영 작가 특유의 따뜻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을 따라, 선택되지 못한 존재들의 외로운 성장과, 연결을 향한 갈망을 다섯 개의 감정적 키워드로 풀어낸다.
1부 – 부모 면접이라는 기이한 풍경
『페인트』의 첫 장면은 다소 충격적이다. '아이들이 부모를 면접 본다'는 설정. 우리는 늘 부모가 아이를 선택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책은 그 프레임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이 아이들은, 자신을 길러줄 '부모'를 고른다. 그러나 그 선택의 주체는 진정 아이들일까? 혹은 그 시스템을 만든 어른들일까?
이 설정은 단순한 SF적 장치가 아니다. 작가는 그 설정을 통해 '가족'이라는 개념을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려 한다. 가족이란, 진짜 무엇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유전자, 계약, 책임감, 혹은 사랑? 『페인트』는 이 모든 질문을 청소년들의 목소리로 되묻는다.
주인공인 '제이'는 조용한 인물이다. 그는 이미 너무 많은 면접을 경험했다. 그에게 부모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거절해온 존재들이다. 그래서 그는 어른을 믿지 않는다. 믿음을 거절당한 이가 다시 믿는다는 건, 가장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면접이라는 시스템은 어쩌면 가장 잔인한 게임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품은 결핍과 상처를 감춘 채 '괜찮은 아이'로 보이려 애쓴다. 하지만 『페인트』는 그 감춰진 목소리를 드러낸다. 진짜 하고 싶었던 말, 하지만 해선 안 되는 말, 그 말들이 페이지마다 삐죽이 튀어나온다.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제이의 시선이 철저히 감정을 경계한다는 데 있다. 그는 냉소적이고, 차갑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무표정한 말 속에는 '버려질까 두려운 마음'이 숨어 있다. 아이들은 거절당하는 것에 놀랍도록 민감하다. 그리고 그 예민함은 보호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페인트』는 그 보호받지 못한 마음들을 차분하고 세밀하게 보여준다. 아무도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았던 아이가 어떻게 사람을 경계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 마음이 다시 열릴 수 있는 가능성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2부 – 관계가 아닌 계약으로 시작된 가족
『페인트』에서 가족은 더 이상 주어진 운명이 아니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보호 시설인 NFK(National Foster Kids)는 부모가 될 사람들을 ‘면접’하고, 아이들은 그 면접에서 어른들을 평가한다. 이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가족의 구조를 완전히 뒤바꾼다. 이 책은 바로 그 '낯선 구조'를 통해 진짜 가족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가족이 계약이라면, 그 계약의 조건은 무엇인가? 혈연? 양육 능력? 경제적 자산? 혹은 사랑? 『페인트』는 아이들이 그 기준을 질문하게 만든다. 우리는 부모라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는, 어른들도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인간됨을 증명해야 한다.
주인공 제이와 동료들은 면접장이라는 공간에서 끊임없이 판단한다. 이 어른은 진심일까? 나를 위한 사람일까, 아니면 아이를 키우는 행위 자체를 ‘인생의 경험’으로 소비하려는 사람일까. 『페인트』의 세계에서는 어른도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더는 따뜻함의 동의어가 아니다. 그건 오히려 냉정한 시스템 안에서 주어지는 ‘자격’ 같은 것이다. 이 설정은 현실에서 부모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수많은 아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법적 책임은 있어도, 정서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어른들. 『페인트』는 그 틈을 조용히 파고든다.
계약으로 시작된 가족은 감정을 보류하게 만든다. 정해진 시간, 조건, 그리고 해지 가능성. 아이들은 그 불안정한 조건 안에서 자신을 지키려 애쓴다. 그 방어 기제는 냉소가 되기도 하고, 무표정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속 아이들은 ‘연결’을 꿈꾼다. 단지 생존을 위한 만남이 아니라, 마음이 머물 수 있는 관계를 원한다. 아이들이 어른을 평가하는 그 냉정한 시스템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은 꺼지지 않는다.
『페인트』는 묻는다. "사랑 없는 관계도 가족이 될 수 있을까?" "책임만으로는 충분한가?" "내가 가족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단지 소설 속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도 얼마든지 유효한 물음이다.
이 작품은 단순히 청소년의 성장 서사를 넘어서 ‘관계의 본질’을 다룬다. 우리는 누군가와 어떤 조건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그 연결은 진짜일까, 아니면 필요에 의한 동행일 뿐일까? 『페인트』는 그 고민을 독자 스스로 풀어내도록 만든다.
결국, 관계는 계약이 아니라 ‘지속’에서 증명된다. 한 번의 선택보다, 수많은 순간의 애씀이 관계를 만든다. 이 소설은 그렇게 말한다. 사랑은 단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이어가려는 노력임을.
3부 – 선택받지 못한 존재들의 마음
『페인트』에서 가장 뼈아픈 감정은 ‘기다림’이다. 아이들은 늘 누군가가 자신을 선택해주기를 바란다. 어른들이 면접장에 들어올 때마다 기대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마음. “이번에는 나를 진짜로 원할까?” 그 질문은 이야기 속 인물뿐 아니라 이 소설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울린다.
선택받지 못한 경험은 마음 깊은 곳에 상처를 남긴다. 그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어와 행동, 관계의 모든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페인트』의 아이들은 웃지 않는다. 그건 기쁨이 없어서가 아니라, 기쁨을 표현할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묻는다. “사람은 선택받지 못해도, 존엄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질문은 우리 사회가 쉽게 지나치는 존재들— 고아, 시설아동, 가정폭력 생존자, 혹은 사랑받아본 적 없는 이들—의 삶을 상기시킨다.
주인공 제이는 그 선택의 부재 속에서 자신을 ‘거절당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는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먼저 다가가지 않고, 그 어떤 관계에도 기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안에는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기대고 싶은 갈망이 숨어 있다.
『페인트』는 그 이중적 감정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따뜻함을 꿈꾸는 소년. 어른들을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누군가가 다정하게 안아주길 바라는 마음. 그 양가적인 감정이 이 소설을 더욱 현실적으로 만든다.
선택의 기준이 아이가 아니라 어른의 입맛에 맞춰져 있을 때, 그 선택은 불완전하다. 『페인트』는 그 구조를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있는 아이들의 감정을 전면에 내세운다. 결국 중요한 건 ‘고르는 권리’가 아니라, ‘존중받는 감정’이라는 걸 말이다.
작품 속 아이들은 자주 묻는다. “왜 나는 선택되지 않았을까?” “왜 나에게는 기회가 더디게 오는 걸까?” 그 물음은 우리 사회의 수많은 낙오자, 잊힌 사람들의 속마음과 닮아 있다.
이야기는 그들에게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그 마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충분히 다정하다. 그리고 그 다정함은 읽는 이의 마음 어딘가를 천천히 감싸준다.
『페인트』는 결국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선택받지 못한 시간 속에서도 너는 충분히 존재의 이유가 있어.” 그 말 한 줄이, 이 책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든다.
4부 – 질문을 되돌려주는 용기
『페인트』에서 가장 강렬하게 다가오는 장면은 아이들이 어른에게 질문을 되돌려주는 순간들이다. 면접이라는 형식 안에서 아이들은 응답자가 아니다. 그들은 주체이고, 판단자이며, 때로는 그 자리에서조차 조심스러운 도전자가 된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 도전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왜 아이를 갖고 싶으신가요?”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당신은 진짜로 나를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나요?” 이 질문들은 단순한 체크리스트가 아니다. 아이들이 진심으로 던지는 ‘검증’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을 내세우기 전에 당신은 나에게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
제이는 그 질문을 던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묻기 바빴다. “나는 괜찮은 사람일까?” “왜 나를 원하지 않는 걸까?” 하지만 점점 그는 질문의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다. “그들이 정말 괜찮은 사람일까?” “내가 그들의 자식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 전환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주체성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너무 오랫동안 아이들에게 ‘받아들이는 역할’만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이 작품은 말한다. 아이들에게도 거절할 권리, 묻고 따질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질문을 던진다는 건 용기다. 특히 어른이라는 권위 앞에서 침묵 대신 질문을 택하는 일은 매우 큰 에너지를 요구한다. 『페인트』는 그 용기를 존중한다. 그리고 그 질문이 비로소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면접자는 당황한다. 어떤 어른은 대답하지 못한다. 그 반응조차 이 소설은 날카롭게 포착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그 물음에 대해 어른들조차 제대로 답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 사실은 소설 밖 현실에서도 유효하다.
『페인트』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너는 묻고, 거절하고,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정치적인 선언이며, 존엄에 대한 권리의 선언이다.
우리는 종종 약한 존재에게 말을 가르치려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약한 존재가 세상을 향해 질문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 질문은 단지 부모 면접장에서만 유효하지 않다. 삶 전체에 걸쳐, 관계 속에서, 자기 존재를 증명해야 할 모든 순간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연결될 수 있을까?”
『페인트』는 그 질문을 멈추지 말라고 말한다. 그 질문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결국 ‘진짜 가족’과 ‘진짜 관계’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5부 – 우리는 연결될 수 있을까
『페인트』는 연결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의 연결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 책은 더 넓은 의미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짜로 무언가가 닿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제이는 어릴 때부터 수많은 단절을 경험했다. 거절당하고, 이별하고, 외면당하며 자란 그는 누군가와 연결되는 감각에 익숙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모든 시도는 조심스럽다. 그는 천천히, 아주 조금씩 마음을 열고, 그 속에서 어떤 감정을 확인한다. 그 감정은 단순한 애착이 아니라, ‘함께 있어도 되는 나’에 대한 안심이다.
연결이란, 그래서 결국 ‘존재의 수용’이다. 그 사람이 어떤 과거를 가졌든,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감각. 『페인트』는 그 감각이 얼마나 결핍된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지를 일깨운다.
NFK 시스템은 체계적이고 효율적이다. 하지만 제이는 그 시스템이 끝내 ‘감정의 연결’까지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사람 사이에 필요한 것은 기준표가 아니라, 응시이고, 기다림이며, 말이 없는 순간의 공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후반부는 ‘선택’보다 ‘응시’에 집중한다. 누군가를 끝까지 바라보는 일.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이해하려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 그 태도가 가족을 만들고, 관계를 깊게 만든다.
『페인트』는 감정을 신중하게 다룬다. 절대 감상적이지 않지만, 결국 가장 따뜻한 곳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그 따뜻함은 말의 위로가 아니라, 존재를 인정받는 위로다.
제이는 어느 순간, 자신이 누군가에게 ‘질문’이 아닌 ‘대답’이 될 수도 있음을 느낀다. 누군가가 나를 원한다는 감각, 내가 누군가의 삶에서 ‘필요한 존재’라는 확신. 그것이 그의 삶을 바꾼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남는다. 아주 오랫동안 마음속 어딘가에서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반복한다. 누군가와 연결되는 일은 두렵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그 일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페인트』는 결국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연결될 수 있어.” 그리고 그 말 한마디는 모든 소설보다 더 큰 울림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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