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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책 리뷰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by new-story1 2025.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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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목차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단순히 한 남자의 파란만장한 인생담이 아니다. 이 작품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이고도 육체적인 대답을 던진다. 우리는 이 책에서 삶의 본능과 이성을, 쾌락과 두려움을 동시에 마주하게 된다. 이 리뷰에서는 조르바가 보여주는 날것의 자유를 5부로 나눠 깊이 탐구해본다.

 

 

1부 – 삶 앞에서 머뭇거리는 우리

 

『그리스인 조르바』는 작중 화자이자 ‘나’인 젊은 지식인이 탄광 사업을 하기 위해 크레타섬으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그 여정에서 그는 한 늙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난다. 이 만남은 단순히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머리로만 사는 자”와 “몸과 심장으로 사는 자”의 격돌이며,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동행이다.

 

화자는 책과 철학, 이상 속에 머물던 사람이다. 세상을 탐구하려 들지만, 사실 그 자신은 삶의 본질적인 열정과 충동을 피하고 있었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사랑이 아프기 때문에, 그저 지성이라는 장막 뒤에서 모든 것을 관찰하며 머뭇거린다. 그는 사색에 빠져 있지만, 실제로는 살아본 적이 없는 인간이다.

 

이 젊은 화자에게 조르바는 폭풍처럼 들어온다. 첫 만남에서부터 그는 자유롭다. 거칠고, 욕을 하고, 과거의 여자들을 이야기하며 눈을 반짝인다. 무엇보다 그는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왔음을 태연히 말한다. 조르바에게 삶은 해석이 필요 없다. “사는 게 중요하지, 왜 사는지는 나중 문제야.” 그의 태도는 그렇게 단순하면서도 깊다.

 

크레타섬에 도착해 본격적으로 탄광을 시작하면서, 화자는 조르바를 통해 점점 더 많은 깨달음을 얻는다. 조르바는 자주 노래하고, 춤을 춘다. 자신의 몸과 감각을 마음껏 쓰며,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라 믿는다. 반면 화자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저렇게 살아도 될까?” 고민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부러워진다.

 

1부의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삶 앞에서 얼마나 자주 머뭇거리는가?” 조르바는 우리 각자가 갖고 있는 억눌린 본능을 대변한다. 그는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화내고, 웃는다. 화자가 그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놓치지 못하는 건, 조르바가 보여주는 그 솔직함 때문이다.

조르바는 말한다. “내 몸엔 신이 있어. 난 내 몸이 가고 싶은 대로 둬. 그게 신의 뜻일지도 모르니까.” 우리는 종종 신을 하늘 저 너머에 두지만, 조르바는 그 신을 자신의 뱃속에서 찾는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신앙이다.

 

독자도 이 첫 부분에서부터 이미 화자와 함께 조르바에게 매혹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머리로만 살아가느라 조르바를 닮은 부분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아무 계산 없이 마음껏 웃어본 적이 있었나?”

 

이제 이 여정은 시작되었다. 조르바와 화자가 함께 벌이는 사업, 그 안에서 터지는 갈등, 우정, 그리고 거듭되는 인생의 질문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리고 조르바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의 가슴을 흔들어 놓을 것이다.

 

 

2부 – 조르바라는 인간, 자유라는 신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두 번째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조르바라는 인간을 탐색하는 시간이다. 화자가 관찰하는 조르바는 단순히 괴짜 노인이 아니다. 그는 자연 그 자체이며, 야성적이고 관능적인 인간 본연의 모습을 품고 있다.

 

조르바는 매일같이 화자에게 철학을 늘어놓는다. 그의 철학은 대학 강의실에서 배운 추상적인 개념과는 다르다. 조르바의 철학은 몸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뇌로 사는 놈들은 매일매일 죽지. 그놈들은 겁에 질려있거든. 그게 바로 인간을 허약하게 만드는 거야.” 이 말은 화자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깊게 꽂힌다.

 

조르바에게 삶은 단순하다. 먹고, 마시고, 일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존재 이유다. 한때 그는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마저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받아들인다. 누군가를 사랑해서 결혼했고, 그러다 떠났으면 또 떠나보내면 그만이다. 후회도, 미련도 없다. 그는 과거에 매달리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화자는 늘 지난 일을 붙잡는다. 책 속에서, 기억 속에서 과거를 붙들고 그것을 해석하려 애쓴다. 조르바는 그 모습을 보고 껄껄 웃는다. “왜 그렇게 골치 아프게 살아? 살았으면 됐지, 그게 전부야.” 조르바의 말투는 가볍지만, 실은 무거운 삶의 진실을 품고 있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밤에 모닥불 앞에서 조르바가 담배를 피우며 자신의 지난 인생을 쓸쓸히 털어놓는 대목이다. 어릴 적 가난, 전쟁에서의 도망, 도적 생활, 무수한 여자들과의 이야기. 그는 파란만장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화자가 “당신은 왜 그렇게 살아왔습니까?”라고 묻자, 조르바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한다. “자유롭고 싶어서지. 나는 내 목숨이 내 것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

 

조르바는 자유를 신처럼 모신다. 하지만 그 자유란 규율을 깨뜨리거나 방탕을 일삼는 것이 아니다. 조르바에게 자유란 “자기 욕망과 두려움을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다. 그는 세상의 도덕이나 종교적 금기에 휘둘리지 않는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솔직히 미워하고, 사랑하면 전부 내어주며 사랑한다. 무엇보다 그는 자기 삶의 결과를 누구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그런 조르바를 지켜보며 화자는 점점 흔들린다. 그동안 책에서 배운 인간다움은 무엇이었을까? 품위 있는 교양인이 되는 것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이었을까? 조르바를 보면서, 그는 뼛속까지 느낀다. 진짜 인간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과 배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조르바가 유독 애정 어린 시선으로 말하는 것은 바로 ‘춤’이다. “내 몸이 가만히 있지 못하면 춤을 춰야지. 그게 신의 명령이야.” 조르바에게 춤은 기쁨의 표현이자, 두려움과 슬픔을 쫓아내는 의식이다. 그 춤을 통해 그는 다시 자기 몸을 확인하고, 세상과 맞서 싸울 에너지를 얻는다.

 

화자는 그런 조르바가 부럽다. 그 부러움이 점차 존경으로 바뀌고, 마침내 두렵기까지 하다. 조르바는 자신의 삶에 거짓이 없다. 무엇이 옳은지 틀린지를 따지지 않고, 그냥 지금을 살기 때문이다.

 

독자는 조르바라는 인물을 완전히 사랑하게 된다. 그는 무례하고, 조잡하고, 때로는 경멸스러울 정도로 솔직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기에 더욱 눈부시다. 그는 삶에 망설임이 없다. 그 진짜 자유를 보며 우리는 마음속에 묻는다. “나는 과연 내 삶을 내 방식대로 살고 있는가?”

조르바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 안에 숨겨진 욕망의 얼굴이기도 하다. 책을 덮을 때쯤이면, 우리는 알게 된다. 왜 수많은 독자들이 “조르바처럼 살고 싶다”고 고백했는지를.

 

 

3부 – 사랑과 죽음을 춤추다

 

마침내 사랑과 죽음이라는, 인간 존재의 가장 원초적인 두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조르바에게 사랑은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뜨겁고 즉각적인, 몸과 몸이 만나고 영혼이 흔들리는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늘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이 마을에는 ‘미망인’이 살고 있다. 아름답지만 과부라는 이유로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 갇힌 여인이다. 젊고 당당하며, 자신의 매력을 알기에 더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조르바는 그런 미망인을 보며 솔직하게 흥분하고, 화자에게도 그 열망을 숨기지 않는다.

“여자는 봐서 좋으면 그냥 좋은 거야. 그 이상 따질 게 뭐 있나?” 조르바의 말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뒤에는 두려움 없는 태도가 깃들어 있다. 사랑하고 싶으면 하고, 미워하면 미워하고, 그것에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미망인을 향한 음습한 욕망을 감춘 채,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심리적으로 가두려 한다. 종교와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여자가 자유롭게 욕망을 가지는 것을 질타한다. 조르바는 그런 시선을 조롱하며 화자에게 말한다. “그놈들은 겁쟁이야. 못 가지니 욕하는 거지.”

 

결국 비극은 찾아온다. 마을 청년이 미망인을 사랑했지만, 그녀가 조르바와 가까워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사건은 이 작은 공동체에 폭탄을 던진다. 사람들은 비탄 속에서 원인을 찾으려 하고, 그 화살은 곧 미망인에게로 향한다. 여자가 남자를 죽게 했다는 비난. 그것은 여성에 대한 폭력적 담론의 가장 오래된 형태다.

 

결국 미망인은 잔혹하게 살해당한다. 조르바는 이 비극 앞에서 격렬히 분노한다. 그는 그녀의 시체 앞에서 흐느끼며 외친다. “산 채로 살아 있었는데… 이놈들아, 뭘 죽인 거냐?” 조르바에게 사랑과 욕망은 곧 삶이다. 그 삶을 잔인하게 꺾은 마을 사람들의 위선과 잔혹함에 그는 끝내 눈물을 흘린다.

 

이 대목은 독자에게도 강렬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도덕’이나 ‘체면’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자유를 죽이는가? 그리고 그 죽음 앞에서 얼마나 손쉽게 죄책감을 다른 이에게 돌리는가?

 

화자는 이 사건을 지켜보며 정신적으로 크게 흔들린다. 책으로 배운 인간 사랑, 정의, 도덕이 실제의 피 묻은 현실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깨닫는다. 그리고 조르바를 보며 문득 부끄러워진다. 그는 평생 정직하게 자기 욕망과 사랑을 마주했지만, 자신은 늘 머릿속으로만 고고한 정의를 논했기 때문이다.

 

조르바는 말한다. “사랑이란 건 머리로 하는 게 아니야. 몸이, 가슴이 뛰는 대로 하는 거지. 그게 실패하더라도 어쩔 수 없어. 그래도 살아있었다는 증거니까.”

 

조르바의 말은 원시적이고 투박하다. 그러나 그래서 더 진실하다. 그는 사랑을 계산하지 않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했기에 더 깊게 산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끝없이 춤추는 이유다. 죽음은 언제든 찾아온다. 그렇기에 조르바는 오늘, 지금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사랑과 죽음을 나란히 놓으며 인간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그럼에도 왜 사랑하려 하는가? 왜 욕망을 향해 몸을 던지는가? 조르바의 삶은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그게 살아있기 때문이야.”

 

조르바는 말끝마다 화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도 언젠간 죽어. 그러니 오늘 살아라.” 그 말은 단순하지만, 모든 철학서보다 더 무겁게 들린다. 이 소설이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결국 이 단순한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4부 – 삶을 향한 무모한 몸짓

 

『그리스인 조르바』의 4부에 이르면, 독자는 어느새 조르바와 화자 사이에 오간 철학적 대화, 삶을 향한 탐구와 충돌, 그리고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통해 깊숙한 곳까지 여행을 다녀온 느낌을 받는다. 지금까지가 삶의 의미를 가로지르는 긴장과 준비였다면, 이후 에서는 본격적으로 ‘삶을 살아내는 방식’에 대한 조르바의 몸짓이 이야기의 중심을 잡는다.

 

조르바가 화자에게 수없이 던졌던 질문들, “왜 그렇게 머리로만 사나?”, “그 많은 책이 네 배를 채워주던가?” 같은 물음은 이 시점에서 더욱 날카롭게 박힌다. 화자는 여전히 고전을 읽고 명상하며 자신만의 사색 속에 빠지려 한다. 하지만 조르바는 그 순간에도 와인잔을 기울이고, 농담을 던지며,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노래를 부른다. 화자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때로는 유치해 보이는 이 행동들이 사실은 조르바가 삶을 가장 정직하게 대면하는 방식이라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난다.

 

4부에서 조르바는 더욱 거침없다. 광산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도 그는 불안 자체를 껴안는다. “산이 무너지면 어쩔 테냐”는 화자의 물음에 조르바는 크게 웃는다. “그럼 무너지는 거지, 뭘 어쩌겠나!” 그 태도는 현실 회피가 아니라, 삶이 가진 본래의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거기 뛰어드는 태도다. 그는 삶을 계산하지 않는다. 위험도, 실패도, 죽음조차도. 그래서 그의 자유로움은 무모하지만, 동시에 숭고하다.

 

조르바와 화자는 여러 번 충돌한다. 화자는 책에서 배운 도덕, 규범, 이상을 붙잡으려 하고, 조르바는 그런 추상적 개념을 번번이 깨뜨린다. 그 사이에서 화자는 처음에는 불편해하고 방어하지만, 조르바를 통해 조금씩 변해간다. 그는 처음으로 진짜로 웃고, 진짜로 분노하며, 진짜로 사람을 원하게 된다. 조르바가 보여주는 삶의 방식은 그저 “즐기자”라는 가벼운 명제가 아니다. 그것은 더 큰 고통과 더 큰 기쁨을, 온몸으로 감당하겠다는 선택이다.

 

이 부에서 특히 돋보이는 것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조르바가 얼마나 너그럽게 받아들이는지이다. 그에게 잘못, 실패, 망신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이니까 그러지.” 조르바가 던지는 이 한마디에는 모든 허영과 불안을 껍질 벗겨내는 힘이 있다. 화자는 그 말 앞에서 자신이 왜 그토록 두려워하며 살아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놓치며 살아왔는지 깨닫는다.

 

조르바의 연애도 이 부분에서 크게 비중을 차지한다. 늙은 창부인 ‘마담 오르탕스’를 향한 조르바의 구애는 철없고 무모해 보인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삶의 본질에 가깝다. 늙은 몸, 사라져가는 미모, 짧은 미래. 하지만 조르바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오르탕스를 끌어안고 춤추고, 구애하고, 가슴에 꽃을 달아준다. 마담 오르탕스는 자신의 마지막 빛나는 순간을 조르바를 통해 살게 된다. 그 장면은 슬프면서도 너무나 아름답다. 누구도 늙음 앞에서 당당할 수 없지만, 조르바는 오히려 그 늙음을 끌어안아 축제로 바꾼다.

 

4부의 절정은 결국 그들이 함께 실패를 겪는 데 있다. 거창하게 준비한 목재 케이블 운반 장치(그 유명한 ‘조르바의 케이블카 프로젝트’)가 마지막에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는 장면. 화자는 그 참담한 실패 앞에서 망연자실하지만, 조르바는 웃으며 말했다. “좋았어, 대장. 그래도 우리가 멋지게 해봤잖아.” 실패를 통해 그는 다시 한 번 삶의 본질을 화자에게 가르친다.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 망해도 괜찮은 것,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이라는 것.

 

조르바는 이 실패 속에서 더 빛난다. 인간은 태어나서 반드시 무언가를 시도하고, 결국 그것이 무너져 내릴 때조차 기꺼이 그것을 보며 웃을 줄 알아야 한다. 화자는 그제야 깨닫는다. 조르바가 진정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어떤 결과에도 구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성공도 실패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모든 순간을 최대치로 살아낸다.

 

“당신은 지금 얼마나 삶을 껴안고 있는가?” 우리는 조르바처럼 모든 것을 던져 웃을 수 있는가, 아니면 머릿속 계산과 두려움 때문에 한 발자국도 못 나서고 있는가. 카잔차키스는 이 질문을 독자에게 조용히, 그러나 뼈아프게 남긴다.

 

조르바는 실패한 다음 날에도 아침 햇살을 맞으며 춤을 춘다. 화자는 그 모습을 보며 비로소 조금 웃는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뭔가가 처음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과 체면이었다. 두 사람은 마침내 손을 맞잡고 광장에서 춤을 춘다. 아무 음악도 없지만, 그것은 그들 인생에서 가장 큰 음악이었을 것이다.

 

다음에서는, 이렇게 조르바에게서 삶을 배운 화자가 마지막으로 무엇을 붙잡게 되는지, 그리고 그 이후 남는 공허와 기이한 충만함을 이야기하며 이 여정을 마무리하게 된다.

 

 

5부 – 마지막 춤, 그리고 남은 질문

 

『그리스인 조르바』의 마지막 장면들은 고요하지만, 그 안에 담긴 울림은 폭발적이다. 이제 우리는 조르바가 왜 그렇게 웃고, 춤추고, 사랑했는지를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답은 역설적이게도 ‘삶이 유한하기 때문’이라는 사실 속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조르바와 화자는 결국 큰 손해를 입고, 그토록 준비했던 광산 사업은 허망하게 끝난다. 주변 사람들은 등을 돌리고, 남은 건 빚더미와 조르바의 낡은 모자 뿐이다. 하지만 조르바는 전혀 초라하지 않다. 오히려 실패 이후의 그가 더 당당하다. 화자는 그 모습에 놀란다. 자신이라면 결코 태연할 수 없을 이 상황에서, 조르바는 머리 위로 손을 번쩍 들며 “춤추자!”라고 외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래사장에서 춤을 춘다. 아무 음악도, 아무 구경꾼도 없다. 그저 두 사람의 발자국과 웃음, 그리고 바람이 전부다. 이것이 『그리스인 조르바』의 가장 유명한 엔딩이다. 이 장면은 모든 것을 함축한다. 인간은 결국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결국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무의미해질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온몸으로 살아낼 수 있다는 선언이다.

 

카잔차키스는 이 마지막 춤을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의식’처럼 묘사한다. 화자는 그 전까지 언제나 머리로만 살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조르바와 함께 이 춤을 추며 비로소 깨닫는다. 사람은 이성과 계산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계산을 내려놓고 살아있는 몸과 영혼으로 순간을 껴안는 것이라는 사실을.

 

조르바는 춤을 통해 삶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다 보여준다. 그는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산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오늘을 미루지 않는다. 사람들은 언제나 내일을 계획하고, 노후를 준비하고, 안전한 길만을 택하지만, 조르바는 지금 여기에서 불꽃처럼 살아간다. 그 불꽃은 결국 꺼지겠지만, 타오르는 동안만큼은 누구보다 찬란하다.

 

그리고 화자도 마침내 깨닫는다. 자신의 책과 사상, 고상한 철학이 결국은 ‘살아보지 못한 삶의 관념’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조르바를 보며 부끄럽고도 벅찬 심정을 느낀다. 조르바야말로 철학자이며 성직자이며 예술가였다. 그는 몸으로, 웃음으로, 욕망으로, 실패와 상처로 인생을 배웠다. 그 깊이를, 화자는 이제야 조금 맛본다.

 

조르바와 헤어진 뒤, 화자는 한동안 멍하니 남는다. 마치 거대한 폭풍이 지나간 뒤의 빈 들판처럼. 하지만 그 공허는 두려움이 아니다. 오히려 묘하게 따뜻하다. 그는 더 이상 이전처럼 책 속에서만 살지 않을 것이다. 조르바와의 시간은 그의 피 속에 남아 그를 앞으로도 계속 흔들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 우리도 화자와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나는 얼마나 살아봤을까?” 삶은 늘 불확실하고, 실패를 안고 있고, 언젠가는 죽음에 닿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격렬히 살아야 하지 않을까? 조르바는 그것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그 진실을 알았기에 그는 바보 같을 정도로 웃고, 울고, 사랑했다. 그리고 춤췄다.

 

이 작품은 결국 우리에게 ‘삶의 방식’을 묻는다. 조르바처럼 살 수 있는 용기가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계산 속에 머물 것인지. 그 질문은 강요가 아니다. 다만 조용히 가슴 속에 스며들어, 어느 순간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몸을 흔들게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화자가 다시 혼자 남은 해변에 서 있는 모습은 슬프면서도, 이상하게도 희망적이다. 그는 조르바처럼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언젠가는, 머릿속 무거운 생각들을 던져버리고 모래사장에서 춤을 출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래서 끝나도 끝난 이야기가 아니다. 조르바의 목소리와 웃음, 손짓이 오래도록 우리 마음 속에서 울린다. “춤추자! 그래야 삶이니까!” 그 부름에 언젠가 우리도 기꺼이 발을 굴릴 수 있기를, 그렇게 이 소설은 마지막까지 우리를 설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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